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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December 13, 2010

[스크랩] 왜 하필 국회의사당 앞에 벚꽃이 지천으로 깔리나

일본에게 학살당하고 강간당하고 고통당하신 선조들께서 지하에서 통곡을 하시겠구나.

더 우낀건 벚꽃축제 비난할때마다

일본의 국화는 벚꽃이 아닌 국화라는 국화론 소리해대며 그리고

벚꽃의 원산지는 제주도라며 원산지론 들이밀며

벚꽃축제를 옹호하는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는 노예근성적 발언을 항상 해대는 충실한 노예근성을 보이는 애들이 있는데

지하에 계신 선조들께서 이 애들 때문에 두번 가슴이 찢어지신다.

1,국화론

일본의 국화는 벚꽃이 아닌 다른꽃이니 괞단다?

= 벚꽃이 일본국화는 아닐지언정 일본인들의 정신정인꽃 일본인들의 민족꽃이다.일본인들이 일본인을 상징하는 일본의 민족꽃이다. 그런데도 국화만 아니면 되는가?

< 세계일보>는 “벚꽃은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벚꽃 가지를 꽂고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죽음’과 ‘산화’를 떠올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사무라이의 ‘할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정신이자 사실상 ‘일본의 나라꽃’”이라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집권 이후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벚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때”라고 문제를 제기했다.<세계일보>는 “벚꽃은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벚꽃 가지를 꽂고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죽음’과 ‘산화’를 떠올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사무라이의 ‘할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정신이자 사실상 ‘일본의 나라꽃’”

2, 원산지론

벚꽃의 원산지는 한국이니 괜찮다?

=그럼 일본인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니 일본인은 한국인인가? 일본의 한국침략과 식민지배 민족말살도 일본은 한국이니 한국이 한국을 공격한 것이니까 뭐 침략도 아니고 말살도 아니고 식민지배도 아닌 그냥 뭐 괜찮은 것이겠네.

그럼 무궁화는 원산지가 중국이니 중국꽃이군.

대한민국 벚꽃축제의 진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4019.html

3~4월 벚꽃구경은 하나의 여행상품으로 각광받을 정도로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문화가 됐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제가 을사조약 이후 ‘사쿠라’를 서울 도심부터 전국으로 심어 정서의 일본화를 꾀했다”고 지적한다.

벚꽃도시 진해의 기원은 러일전쟁 전승기념탑 건립과 벚나무 심기


세계적인 벚꽃 도시인 진해의 경우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의 전승지로 제왕산 꼭대기에 1929년 ‘일본해해전기념탑’을 세우면서 벚꽃 심기에 참여한 것이 기원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울시 기획관리실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세계일보>에서 “재일교포가 기증한 꽃을 어디에 심을까 고민하다 미국 워싱턴DC 포토맥 강변의 벚꽃처럼 여의도에 심을 것을 제안해 1960년대 여의도 국회뒷길에 둑을 쌓으면서 환경미화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이 당시 벚꽃 심기 운동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논거는 박만규, 부종유 두 식물학자가 한라산에서 자생 왕벚나무를 발견한 뒤 내놓은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라는 학설이었다. 그러나 이 연구결과에도 벚꽃이 일본의 나라꽃이라는 인식은 여전했고 이 때문에 1960년대 중반 이후 벚꽃 심기 운동에 비판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정부와 지자체는 ‘원산지설’을 앞세워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벚꽃을 심었다고 <세계일보>는 보도했다.

심상정 의원, “문화적 식민전략과 연결된 벚꽃축제 재검토돼야”



벚꽃축제 논란의 불은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이 지폈다. 심 의원은 5일 CBS 라디오 ‘뉴스야 놀자’와의 인터뷰에서 국회 주변의 벚꽃 축제에 대해 “벚꽃 유명 지역의 벚꽃 나무 유래가 일본의 문화적 식민 전략과 연결돼 있는 것은 분명한 만큼 다른 곳은 몰라도 대한민국의 상징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윤중로 벚꽃 축제는 재검토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벚꽃으로 유명한 여의도 윤중로나 진해 등의 벚꽃나무는 재일교포나 일본측에서 전략적으로 옮겨 심은 것이 사실이며, 일본이 우리나라 식민 통치의 상징을 남기고 향수를 느끼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밝힌 뒤 “다른 곳은 몰라도 대한민국 상징인 국회의사당 주변의 윤중로 벚꽃 축제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심 의원은 “꽃을 보고 그냥 즐기지 못하고 여러 신경을 써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시민들이 벚꽃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라면서도 “시민들이 자유롭게 지금 있는 벚꽃들을 즐길 수 있도록 하되, 다만 아직까지 일제침략의 역사 잔재가 남아 있는 현실에서 지자체 정부 차원에서 기획적인 벚꽃 축제를 치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여의도 벚꽃축제 재검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다만, 그는 “그렇다고 이 벚나무들을 당장 다른 나무들로 바꿔 심으려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며 “벚꽃을 어떻게 하자는 식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친일 청산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벚꽃에 대한 논의도 그와 함께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의 벚나무 기증은 결국 문화 침투…일에 의해 악의적 해석 여지”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도 심 의원의 주장을 적극 거들었다. 그는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일제 이후 일본인들이 제국주의의 상징인 벚꽃을 심은 것은 문화의 다양성에서 볼 것이 아니라 문화 침투로 봐야 한다”며 “일본 우파가 ‘한국이 일본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애당초 우리나라에는 벚꽃놀이가 없었고, 벚꽃(사쿠라) 축제 자체가 일본문화의 상징코드”라며 “오늘날 봄철 문화로 벚꽃놀이가 대두되는 것은 민망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전국에 산재한 벚꽃 전부를 문제삼을 수 없지만 현충사 같은 유적지, 국회 등에 벚꽃을 심고 즐기는 것은 우리의 정기를 훼손하는 것으로 삼가야 한다”며 “일본을 연상시킬 수 있는 벚꽃축제를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 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도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벚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좋지만 축제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우리를 일본의 보수우익이 어떻게 보겠냐. 결국 나를 파는 행위”라며 “이는 결국 일본의 문화 침탈을 정당화하는 꼴이며, 우리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벚꽃축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진해나 여의도에 벚나무가 들어온 계기는 러일전쟁 이후, 1960년대 이후 일본인들이 묘목을 기증하면서 이뤄진 것인데 이는 선린우호의 의도가 아니라 문화침탈 차원에서 이뤄졌다며 “지금 이 시점에서 일재 잔재인 ‘벚꽃’과 ‘벚꽃축제’에 대해 냉정하게 정리를 하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

그러나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은 <세계일보>에서 “조성 당시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했지만 늦었다. 지금은 민족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특색 있는 관광축제로 지역경제 활성화와 여가 차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라며 “벚꽃 축제가 지역 연례행사로 자리잡은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온 국민이 ‘벚꽃축제’에 취해 있는 지금 벚꽃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외래문화에 대한 뼈아픈 반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인다. 한편, 여의도 ‘윤중로(윤중제)’의 어원이 강둑이 있는 지역을 뜻하는 일본말인 ‘와쥬우(와주테이, わじゅうてい)’의 한자표기에서 유래돼 일본의 잔재라는 지적도 나오면서 여의도 벚꽃축제와 관련한 논란이 더욱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후 ‘여의방죽’, ‘여의도서로’, ‘국회뒷길’ 등으로 고쳐쓰기로 했지만 여전히 ‘윤중로’라는 지명이 많이 쓰이고 있다.




왜 하필 국회의사당 앞에 벚꽃이 지천으로 깔리는지 모르겠다

일본사람들이 왜 돈을 들여 전국 사방 곳곳에 벚꽃을 퍼뜨리는지 그 의도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은연 중에 일본의 민족혼을 심으려는 것 아니냐. 일본 사람들이 벚꽃을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 다른 나라에 심었다고 해서 그 의미가 순수하다고 할 수 없다. 굳이 꽃놀이를 하고 싶다면 다른 꽃도 많은데 왜 하필 벚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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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November 29, 2010

[스크랩] 이명박 정부의 대북송금

 
[KBS]
한나라당 정권 등장이후 북한에 들어간 현금이 7억6천5백만달러
이명박 정부 들어서 대북 교류가 줄어들면서 송금액도 감소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임기 절반인 지난 6월까지 모두 7억 6천 5백만 달러를 송금했습니다.  
http://news.kbs.co.kr/politics/2010/10/05/2171622.html
 
[조선일보] 2010년 10월 05일(화) 오후 11:40 
국회 외교통상위 윤상현 한나라당 의원이 5일 통일부 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윤상현 의원은 “이명박 정부에서는 정상적인 경제교류만으로도 지난 정부보다도 훨씬 더많은 현금이 북한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http://shyoon.co.kr/comm/bbs/board.php?bo_table=sub03_05&wr_id=693
<인터뷰>윤상현(한나라당 의원):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 북한에다 들어가는 현금이 너무줄어서 북한이 불만이고 남북관계가 경색이 되있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오히려 정 반대이다. 현정부 들어서 더많은 달러가 북한에 들어갔다."

[한국일보]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건설은 2009년 4월 이후에 건설된것.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1011/h2010112121320722450.htm
"미 관리들은 국제사찰단이 추방된 2009년 4월까지 우라늄 시설이 없었던 점과 북한의 경제난, 국제사회의 제재 등을 감안하면 원심분리기는 그 이후 "외부의 도움"으로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뉴욕타임스에 전했다 신고하기 new

Monday, November 8, 2010

[스크랩] 일제차의 불편한 진실

등록일 : 10.10.30 (토) 03:19 | 조회:11,430 | 추천:280

보배드림 직분사터보세단 님의 글 입니다



일제차 사지 말자는 얘기를 국산차 사자는 얘기로 매도하는건 무슨 논리인가요.
막말로, 일제차 브랜드 국내에서 있던 말던 국내 시장에는 하등 영향 없습니다.
한달에 3백대도 안팔리는 캠리, 존재감도 없는 알티마, 어코드..그거 불매한다고 한국 자동차업체들 몇대나 더 팔것 같습니까? 국산차 판매량 늘리자고 일제차 불매하자는건 택도없는 소리입니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경기부양...아니, 출산장려를 하는게 국산차 판매량엔 훨씬 도움이 될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왜 자꾸 일제차 사지 말자고 할까요?

강제로 위안부 끌려간 할머니나, 강제징용되어서 짐승취급도 못받고 팔,다리 잘려나간 할아버지들 캠리나 어코드, 레가시, 알티마 같은 차에 태우실 수 있습니까?
위에 혼다나 토요타 무슨 죄냐고 하시는데..1등 전범기업인 타치가와 비행기에서 수석엔지니어였던 하세가와가 만든게 현재의 토요타가 있게 해준 코롤라, 크라운 같은 차종들입니다.
현재 토요타가 있게 해준 그 대단한 엔지니어가, 우리 부모, 조부모님들 죽이고 다니던 비행기 만든놈이란 말입니다. 물론 타치가와의 강제징용은 말할것도 없구요.
혼다요? 전쟁때 군수부품 만들던 1급 전범기업이 혼다입니다.
닛산이랑 미쓰비시는 말 안해도 유명하죠?

요즘 사람들, 일본 기업들, 정부가 전범기업의 역사를 지우려 모진 애를써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현재 일본을 있게해준 대부분의 기업들이 우리 땅에서 우리 부모 형제, 조부모님들 죽이고 착취하고 자원 강탈해서 거대해진 기업들입니다.
일본에 현재와 같은 대기업들(혼다, 토요타, 캐논과 같은..)이 없었다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대기업들(대다수가 전범기업)이, 당시 한국 침략을 통한 자원강탈, 강제징용 및 인력 착취가 없었으면 존재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 그렇게 착취하고도 6.25 이전까지는 거의 망해갔습니다.
다 망해가다가 어떻게 세계 경제 2위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요?
6.25때 군수품, 물자 등등...이른바 6.25 특수를 통해서 갑자기 일어난겁니다.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있을때, 그네들은 그 피와 고름, 한국의 척수를 뽑아먹으며 세계 경제 2위의 기반을 닦고 있었단 말입니다.

위에 몇몇분들이 부품 얘기 하셨죠??
사실상 전자제품, 차, 공산품들을 살때 그 안에 들어간 부품 하나하나, 칩 하나하나 뜯어봐가며 일제 부품 들어간거 구분해서 안살 수 있습니까? - 불가능합니다.
일제 브랜드 차, 안살 수 있습니까? - 가능합니다.
선택이 가능한 문제와, 선택이 불가능한 문제를 구분하셔야죠.
당연히 가능하다면 부품도 안사는게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일제차 타고, 위안부 할머니들 앞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들 손에 죽어나간 조상님들 뵙기 부끄럽지 않습니까?
일제차를 타고, 자식들에게 일본이 한국에 강제 침탈했던 역사를 당당히 얘기할 수 있습니까??






일본과 무역을 단절하자는 얘기도, 민족주의를 앞세워 일본을 배척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줄건 주고, 얻을건 얻으면서 유리한 교역과 외교를 해야죠.

소비자는 당연한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에 책임이 따르듯, 소비자의 권리에도 선택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본인이 지불한 돈 몇천만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알고 소비해야 현명한 소비자 아닙니까? 어떤분이 거시적인 관점도 말씀하셨는데,
"내가 내 돈내고 샀으니 끝, 난 몰라" 이런 근시안적인 생각 말고, 내가 지불한 돈이 내가 속한 사회와 구성원들, 내가 속하지 않은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아는..거시적인 안목을 갖는 진정한 소비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사 다 배우잖습니까?



쿨한게 대세니까, 쿨하게 과거는 모두 잊었다 칩시다.
과거의 전범기업들이었던..전쟁에 큰 기여를 했던 기업들의 과거는 잊어준다 칩시다.
자, 토요타, 혼다, 닛산, 스바루 등등...이 기업들의 공통점이 뭡니까?
일본 우익단체의 자금줄입니다. 우익세력들의 후원금은 모두 이 기업들이 냅니다.
우익단체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교과서를 지네 입맛대로 고치고, 해외에 김치가 자기네꺼라 하고, 세계에 동해가 일본해라고 알리고, 역사를 왜곡하고...이게 바로 우익단체들이 하는 일입니다. 걔네들 이런 짓 해서 먹고사는 애들입니다.
일본차 사면서 내는 그 몇천만원이 그런 우익단체들의 자금이 된다는 말입니다.
돈을 그런 곳에 쓰고도, 왜구가 교과서를 왜곡하네, 독도가 지네땅이라 하네, 김치가 자기네꺼라 하네, 동해가 일본해라 하네...이걸 욕할 수 있습니까? 본인이 그런데 돈을 후원해주고선 그런걸 욕할 수 있습니까??

그래요, 과거는 과거니까 잊는다 치자구요. 그럼 현재는 어떻습니까?
일본차 타고 독도가 한국땅이라 말하지 마십시오. 독도가 일본땅이라 알리는 단체에 후원금 보낸분들이 무슨..
위안부 할머니들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돈받고 몸팔러온 창녀라고 알리는 단체에 후원금 보낸분들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제와 역사는 별개 아니겠습니까?
세계지도에 동해가 Sea of Japan 라고 적힌데 답답해하지 마십시오. 그 지도 만들고 세계에 뿌리라고 돈 넣어주셨잖습니까?



독일인들 어떻습니까?
아직도 과거를 부끄러이여겨 어디가서 국가 한번 시원하게 못부르고, 자기네 국기 시원하게 자랑 못합니다. 독일내에서 국기 계양하면 사람들 깜짝 놀랍니다. 세계대전 시절, 유태인 핍박 시절이 한참 지난 후에 태어난 독일인들도 자기네 역사 부끄러운거 모르는 사람 없고, 반성 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최소한 일본처럼 있는 사실을 왜곡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강제로 처녀들 끌고와서 군인들 성노리개로 써놓고선, 돈받고 몸판 창녀들로 몰아세우진 않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 얼마전 일본 정부로부터 몇십원씩 받은거 아십니까?
위로금이 몇십원입니다. 독일이 자기네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세계에 미안해하고 있을때, 일본 정부는 강제로 겁탈했던 처녀들에게 위로금이라고 몇십원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런 우익 정치세력들 활동 자금 다 어디서 나올까요? 토요타, 혼다, 닛산, 미쓰비시 같은 회사들입니다.

그리고, 독일인이 우리나라 처녀들 데리고 가서 군인들 성노리개로 강간했습니까? 우리 부모님들 독일인이 죽이고 시체 갈갈히 찢었습니까?
독일인이 독도보고 독일 땅이라던가요? 독일인이 동해가 독일바다라고 하던가요?

만약 왜구들의 만행이 과거에서 그쳤다면, 역사와 경제? 별개일 수 있겠죠.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현재진행형이고, 경제활동에서 발생한 돈이 바로 그 역사왜곡의 자금이 되고, 우익 정치가들과 우익 세력들의 자금이 되는데
어떻게 그게 별개입니까?? 일본차 사는게 역사와 정치와 별개라는 사람은
1. 알면서도 외면하는것 2. 몰라서 하는 소리 3. 그냥 억지
이 셋 중 하나입니다.



이글의 포인트는
전범기업 일제차 회사들의
과거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한국, 한국인에 대한 만행들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의 투표권인 소비를 자제 하자는
내용

동해 해류만 봐도 ‘독도는 우리 땅’


[중앙일보 최현철]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연오랑과 세오녀. 이들이 바위를 타고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 어쩌면 가능했을 것이란 연구 결과가 나왔다. 국립해양조사원이 1993년부터 2008년까지의 인공위성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동해 해류도를 분석한 결과 동해의 해류가 동해안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 일본 오키군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해양조사원은 이를 토대로 고대에도 독도가 우리 영토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31일 밝혔다.

 해양조사원에 따르면 대마난류는 대한해협을 통과해 동해로 들어온 뒤 세 방향(동한난류, 외해분지류, 일본 연안분지류)으로 갈린다. 이 중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동한난류는 중부 지방에서 해안을 이탈해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 일본 오키군도 부근으로 흐른다. 또 종종 울릉도와 독도 사이 해역에서 반경 100㎞의 시계방향 소용돌이를 만들기도 한다.

 해양조사원은 동력을 이용할 수 없었던 2000년 전 바람이나 해류에만 의지해 배를 띄워도 포항에서 동한난류를 따라 울릉도나 독도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고 추정했다. 또 시계방향 소용돌이를 이용해 왕복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오키군도에서 독도 쪽으로는 해류의 흐름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에 고대 항해술로는 뱃길을 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됐다. 해양조사원 변도성 연구사는 “이 같은 표층해류 흐름은 과거부터 한반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로 접근하기 쉬웠음을 보여준다”며 “따라서 물길 분석으로도 독도가 고대부터 우리 땅이라고 추정하는 게 합리적”고 설명했다.

 해양조사원은 이 같은 추정을 실증하기 위해 조만간 고대인들이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뗏목이나 통나무배로 울릉도와 독도 왕복항해를 실행하기로 했다.

최현철 기자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Thursday, September 23, 2010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독도 연설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우리 땅입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병탄된 역사의 땅입니다.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편입하고 점령했던 땅입니다.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한반도 침략전쟁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빌미로 우리 땅에 군대를 상륙시켜 한반도를 점령했습니다. 군대를 동원하여 궁을 포위하고 황실과 정부를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토지와 한국민을 마음대로 징발하고 군사시설을 설치했습니다. 우리 국토에서 일방적으로 군정을 실시하고, 나중에는 재정권과 외교권마저 박탈하여 우리의 주권을 유린했습니다.

일본은 이런 와중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 망루와 전선을 가설하여 전쟁에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점령상태를 계속하면서 국권을 박탈하고 식민지 지배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지금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의한 점령지 권리, 나아가서는 과거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학살, 40년간에 걸친 수탈과 고문·투옥, 강제징용, 심지어 위안부까지 동원했던 그 범죄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입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 그리고 미래의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고 그에 근거한 권리를 주장하는 한, 한일 간의 우호관계는 결코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일본이 이들 문제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한일 간의 미래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관한 일본의 어떤 수사도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경제적인 이해관계도, 문화적인 교류도 이 벽을 녹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한일 간에는 아직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가 획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고, 그 위에서 독도기점까지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해해저 지명문제는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배타적 수역의 경계가 합의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본이 우리 해역의 해저지명을 부당하게 선점하고 있으니 이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따라서 일본이 동해해저 지명문제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배타적 경제수역에 관한 문제도 더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고, 결국 독도문제도 더 이상 조용한 대응으로 관리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도를 분쟁지역화 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견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정부는 독도문제에 대한 대응방침을 전면 재검토하겠습니다. 독도문제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인식, 자주독립의 역사와 주권 수호 차원에서 정면으로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물리적인 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할 것입니다. 세계 여론과 일본 국민에게 일본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끊임없이 고발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잘못을 바로잡을 때까지 국가적 역량과 외교적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그밖에도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할 것입니다. 어떤 비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역사를 모독하고 한국민의 자존을 저해하는 일본 정부의 일련의 행위가 일본 국민의 보편적인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일 간의 우호관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가 결코 옳은 일도, 일본에게 이로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 국민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냉정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국민과 지도자들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사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누차 행한 사과에 부합하는 행동을 요구할 뿐입니다.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행위로 한국의 주권과 국민적 자존심을 모욕하는 행위를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한국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와 기준에 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실과 인류사회의 양심 앞에 솔직하고 겸허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이웃나라에 대해, 나아가서는 국제사회에서 이 기준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일본은 경제의 크기에 걸맞은 성숙한 나라,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서게 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선린우호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지향 속에 호혜와 평등,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해 왔고 큰 관계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 제 양국은 공통의 지향과 목표를 항구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양국 관계를 뛰어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사의 올바른 인식과 청산, 주권의 상호 존중이라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사의 어두운 향수로부터 과감히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21세기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 나아가 세계 평화를 향한 일본의 결단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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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September 22, 2010

Why is Dokdo a Korean island, and Takeshima a fiction?

http://knol.google.com/k/why-is-dokdo-a-korean-island-and-takeshima-a-fiction#



Daijokan order (太政官指令) of 1877 regarding Dokdo

http://knol.google.com/k/byeongju-park/daijokan-order-太政官指令-of-1877-regarding/2zvfgrgyend5c/35



태정관 지령문 (太政官指令)

제목 | `태정관 지령문'은 왜 중요한가
글쓴 사람 : 웹천사 날짜 : 2006-11-20 1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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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관 지령문'은 왜 중요한가>
[연합뉴스 2006-11-20 10:46]

日 태정관 지령문 독도 조선영토 인정

일본 최고국가기관이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 `결정적 사료'
日정부ㆍ관변학계, `독도 고유영토설 붕괴' 우려해 은폐ㆍ왜곡
"문서 내용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야..한국정부 공식제기 필요"

(서울=연합뉴스) 김용수 편집위원 = 태정관 지령문은 1877년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가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는 영토, 다시 말해 조선 영토라고 공식 인정한 문서다.
태정관 지령문이 나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 태정관 지령문은 어떤 내용인가 = 일본 내무성은 1876년 전국의 지적(地籍)을 조사하고 지도를 만들기 위해 각 현에 조사를 지시했다. 그 해 10월 16일 시마네(島根) 현은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 현의 지도와 지적 조사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내무성에 문의했다.

내무성은 17세기 말 조선과 주고 받은 왕복 문서와 기록들을 모두 조사했다. 내무성은 5개월 간의 조사 결과 이 문제는 이미 1699년에 끝난 문제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이며 ‘우리나라는 관계가 없다'고 결론짓고 일본 지도와 지적 조사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내무성은 이 문제가 국가적으로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1877년 3월17일 당시 입법ㆍ행정ㆍ사법 3권을 장악하고 있던 메이지(明治) 정부의 최고 권력 기관이자 의사결정 기관인 태정관(다조칸ㆍ太政官)에 자문을 구했다. 이 때 내무성은 "다케시마 외일도(竹島外一島)는 1699년 조선과 구 일본정부 간에 왕래가 끝나 본방(本邦.일본)과 관계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국가 판도(版圖)의 취함과 버림은 중대한 일이니 확인하고 싶다"고 조회를 요청했다. 여기서 `다케시마 외일도(竹島外一島)'는 울릉도와 독도를 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다케시마'는 울릉도, `외일도'는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 일본은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로 불렀다.

이에 대해 태정관은 자체 조사를 끝낸 후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나라와는 관계가 없다'는 취지의 `일본해내 다케시마 외일도를 판도외(版圖外)로 정한다'는 공문서를 같은 해 3월 29일자로 내무성에 내려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태정관 지령문'이다.

태정관 지령문에는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명심할 것"이라는 문구까지 나온다. 다시 말해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는 구 일본정부(에도 막부) 때 끝난 문제로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내무성에 강한 표현의 명령으로 시달한 것이다. 태정관의 이 지령은 1877년 4월 9일 시마네 현에도 하달됐다.

태정관은 1870년에도 `다케시마, 마쓰시마가 조선의 부속이 된 전말'을 외무성에 조사케 했다. 당시의 조사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나, 주목되는 부분은 태정관이 다케시마, 마쓰시마가 `조선의 부속'이라고 확실히 말했다는 부분이다. 따라서 같은 내용을 조사한 태정관이 1877년 `다케시마 외일도(竹島外一島)는 본방(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밝힌 것은 문서의 맥락상 마쓰시마(독도)를 조선 영토로 확실하게 인정한 셈이다.

◇ 왜 중요한가 = 태정관 지령문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일본의 한 교수가 논문에 이 태정관 지령문의 내용을 언급한 것을 계기로 독도문제를 연구하는 일부 국내 학자와 전문가들이 이 지령문의 존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태정관 지령문이 갖는 `중요성'이 그다지 부각되지 못했다. 일본의 관변 학자들이 지령문에 나오는 `다케시마 외일도(竹島外一島)' 중 '외일도'가 오늘날의 독도를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다거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섬이라는 식의 궤변 등으로 왜곡하거나 은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정관 지령문'을 잘 읽어보면 '외일도'는 '마쓰시마(松島.당시 독도의 일본이름)'라고 기록되어 있고 위치, 크기, 특징 등이 정확하게 현재의 독도를 가리키고 있다.

태정관 지령문이 학계의 주목을 다시 받게 된 것은 일본이 1905년 독도를 자국영토로 강제 편입한 지 만 100년이 된 지난 해 3월,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면서 한일 양국 간에 독도 영유권 논쟁이 불붙으면서다.
일본정부가 전례없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표면화, 노골화한 데 맞서 한국도 그간의 `무시 전략'에서 벗어나 일본의 영유권 공세에 정면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국내 독도 문제 연구가들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허구임을 드러낸 `결정적 사료'로 태정관 지령문을 재조명하게 됐다.

일본이 국제법상의 `무주지(無主地) 선점'을 내세워 1905년 단행한 독도 시마네현 편입은 당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익히 알고 있었던 일본 정부 요직의 관료들이 한 어업인을 사주해 꾸며낸 것이라는 사실이 최근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들 관료가 독도를 시마네(島根) 현으로 억지 편입하는 `공작'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독도를 조선영토로 분명히 인정한 태정관 지령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일본 국민까지 속여온 셈 = 태정관 지령문이 일본에게 얼마나 민감한 `사료'인가는 태정관 지령문의 존재와 내용을 알게 된 일본인들이면 누구나가 지금까지 일본정부가 주장해온 `독도 고유 영토론'이 "뭔가 이상하다"고 의문을 갖게 된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니 명심하라'고 지시한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예로 국내의 한 독도 문제 연구가가 이 태정관 지령문을 일본 정치인들에게 보여주고 내용을 설명했더니 한결같이 "이런 문서가 있었느냐"며 일본 정부의 영유권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 연합뉴스가 이번에 태정관 지령문에 대해 질의하는 과정에서도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자민당 관계자는 연합뉴스의 질의에 대해 "입장이 정리되지 않아 답변을 보류하겠다"면서도 "일본정부가 회답을 할테니 그것으로 대신하겠다"고 답변을 떠넘겼다. 반면 공산당 관계자는 한국측의 지적에 분명한 이해를 표시했다. 이번 질의는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일본 외무성은 수차례의 재촉에도 답변을 차일피일 미루다 "며칠 내로도 답변이 없으면 태정관 문서 내용을 인정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마지막으로 재촉하자 부랴부랴 "조사.분석중"이라는 답변 아닌 답변을 내놓았다. 그만큼 일본 정부와 관변 학자들이 태정관 지령문의 존재를, 독도 영유권의 진실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그 사실을 은폐, 왜곡해 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국내 학계는 일본 독도 연구자들의 필독서인 `다케시마의 역사지리학적 연구'를 저술한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사망)가 저서에서 태정관 지령문을 완벽하게 은폐시켰다고 지적한다. 외무성 연구원으로 사실상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논리를 개발한 가와카미의 은폐 행위가 일본 정부의 주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후 일본정부나 관변학자, 관변 사이트 모두 그의 수법대로 태정관 문서를 은폐, 왜곡시켜온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일본 정부와 관변 학자들은 독도 영유권의 진실을 알 수 있는 결정적 사료를 은폐함으로써 일본 국민까지 속여온 셈이다.

국내의 한 연구가는 "태정관 문서의 내용이 일본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다면 한일 독도영유권 논쟁의 양상이 아마 달라질 것"이라면서 "한국은 이 문서를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독도문제 전문가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 시마네(島根)대 명예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한국정부는 태정관 문서 등을 일본에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따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외무성 팜플렛 주장에 대한 반박

재일교포 독도연구학자 박병섭 씨가 작성하신 반월성 통신의 외무성이 발표한 팜플렛에 대하여 전면 반박하는 글 링크 입니다

http://www.han.org/a/half-moon/kor/mofa-J/mofa-1.html

한국바로알리기 민간기획단 반크에서 반박하는 자료입니다




일본 외무성이 2008년 2월에 발표한 홍보 팜플렛


링크를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이사람] “독도연구 왜 일본자료 활용 안하나”


[이사람] “독도연구 왜 일본자료 활용 안하나”
‘독도는 일본땅’ 연구진에 맞서는 ‘재일 논객’ 박병섭씨
김도형 기자




» 박병섭(66·사진)
30년 회사원, 독학끝 역사이론 ‘무장’
일 우익학계 시모조 교수의 ‘천적’ 활동
“폐쇄적 연구 한계” 지피지기 분발 당부
현재 일본에서 독도에 대해 가장 활발한 발언을 하는 사람은 시모조 마사오(58) 다쿠쇼쿠대학 교수이다. 2005년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 이후 그가 쓴 독도 관련 논문이나 기고문은 연간 5~6편을 헤아린다. 당시 시마네현이 만든 ‘다케시마연구회’의 좌장을 맡아 2년간의 연구 끝에 ‘다케시마 문제에 관한 조사 연구 최종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그는 현재 시마네현의 ‘웹 다케시마 문제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이 연구소 홈페이지에 ‘실사구시’라는 방을 통해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등의 독도 연구 논문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그의 비판 대상 중에는 ‘반월성’이란 필명으로 일본에서 활동중인 재일동포 독도연구가 박병섭(66·사진)씨도 포함돼 있다. ‘반월성 통신’이란 인터넷 홈페이지와 책자를 통해 2000년 이후 독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하는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해온 박씨의 주요한 논박 대상도 시모조 교수이다. 말하자면 시모조 교수와 박씨는 독도문제에 관한 한 천적인 셈이다.

박씨는 지난 6월 영남대에서 펴낸 <독도연구>(제4호)에 실린 ‘시모조 마사오 논설을 분석한다’는 논문을 통해 그 주장의 허구성을 낱낱히 지적했다. 특히 1877년 메이지 정부의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에서 “다케시마(당시 울릉도 지칭) 외 1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라고 지령을 내린 사실의 해석을 둘러싸고 ‘1도가 독도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시모조 교수의 주장을 통렬히 논박했다.

그는 “1987년 태정관 지령을 처음 발굴한 호리 가즈오(교토대 교수)를 비롯해 나이토 세이추(시마네대 명예교수) 등 일본 학자들도 ‘1도가 독도’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시모조는 이 해석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2004년 이후 ‘외 1도는 불분명하다’고 주장하더니 그 후 해마다 자신의 주장을 바꾸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케시마=독도 논쟁>(나이토 세이추와 공저, 2007년 12월 신간사), <안용복 사건에 대한 검증> (한국해양수산개발원 2007년 12월) 등 독도 관련 저서와 논문 5~6편을 펴낸 박씨는 사실 대학에서는 사학과 거리가 먼 물리를 전공했다. 졸업 뒤 일본 회사에서 30년 넘게 평범한 회사원으로 근무한 그는 “역사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마음에서 한-일간 역사를 혼자서 공부했다. 95년 10월부터 일본의 식민통치와 전후 책임 문제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반월성 통신’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해 현재 979건의 논문과 각종 글을 발표했다. 특히 96년 6월8일부터 연재한 종군위안부 관련 글은 100회까지 이어져 보수적인 <요미우리신문>에도 보도되는 등 큰 반향을 불렀다.

“을사조약의 합법성 문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글을 올리자 일본 우익들이 맹렬히 공격을 해오더군요. 상대방의 공격에 침묵할 수 없어 대응하는 차원에서 글을 올리다보니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글이 민족주의 개념을 내세우진 않는다. “역사의 진실은 하나뿐이죠. 독도 문제의 핵심 쟁점인 안용복의 행적을 둘러싼 진실도 한-일간에 격차가 큽니다. 그 격차를 좁힘으로써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내 연구가 (한-일 양국) 사회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독도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주장이나 활동이 일본 내 여론을 거의 움직이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적극적인 일본 내 정보전달 활동을 주문했다. “주일 대사관과 한국문화원에 독도 강연회 같은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요청했지만 정치 관련 행사는 곤란하다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민단 차원에서도 소극적이고요.”

그는 또 한국 역사학자들도 독도 문제와 관련해 일본 쪽 자료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1국주의 연구’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면서 분발을 당부했다.

도쿄/글·사진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기사등록 : 2008-09-04 오후 07:08:52 기사수정 : 2008-09-05 오전 02: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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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the meaning of Dokdo to Koreans? 독도의 의미

[What is the meaning of Dokdo to Koreans?]


First of all, Koreans consider Dokdo as a part of their body.
In fact, the island is proclaimed to be within the territory of the Korean government. As an administrative district, the actual address of Dokdo is 1-96 Dokdo-li, Ulleung-eup, Ulleung-gun, Gyeongsangbuk-do, South Korea. Its exact location is 131 degrees 52 minutes of east longitude, and 37 degrees 14 minutes of north latitude. Dokdo is consisted of two main islands, the East island and the West island, and 89 small attached islands. Its total size is 182,453㎡.

Secondly, Dokdo is a part of Korea's history.
Records show that since the Shilla Dynasty, which existed in Korea about 1500 years ago, Dokdo belonged to Korea. Other historical documents of Korea, such as 'Samguksagi' and 'Sejongjirisillok', support this fact as well. This shows that Dokdo has been an island of Korea since ancient times, and also has been acknowledged so to the Korean people.

Thirdly, to the Korean people, Dokdo is their spiritual birthplace.
Dokdo captures its visitors' soul with its beautiful scenery made up with volcanic islands that were created in the ancient times. Furthermore, with rare sea birds such as fork-tailed petrel, Seum-se and black-tailed gull inhabiting in its islands, Dokdo is officially protected and designated as the natural monument No.336 by the Korean government.

Also, Dokdo is the symbol of pride in Koreans.
Using its geopolitical position of Dokdo and Ulleungdo, Japan attacked the Russia's Balt fleet, and won the war in 1905. Five years later, Japan occupied Korea by force and committed unspeakable atrocities upon the Korean people for 35 years. By the collapse of the Imperial Japan at the World War II, Korea became an independent nation, and Japan returned Korea's land to its rightful owner. However, failing to abandon its militaristic desire, Japan has been arguing its proprietary rights of Dokdo to this day.

To Koreans, Dokdo is a holy cross for peace. It is a symbol of peace that will stop colonialism and militarism from ever reviving again.


* More information about Dokdo
http://www.dokdo.go.kr/
http://www.dokdo.re.kr/
http://www.dokdomuseum.go.kr/
http://www.korea.net/news/issues/issueView.asp?issue_no=45


[독도의 의미]

독도는 한국인에게 있어 신체의 일부분입니다.

독도는 대한민국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섬으로, 동경 131도52, 북위 37도14에 위치해 있습니다.
행정구역상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96번지에 있으며
2개의 큰 섬인 동도와 서도 그리고 89개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총면적은 187,453㎡에 달합니다.

독도는 한국인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독도는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영혼을 사로잡을 만큼 신비스러운 매력을 간직한 태고의 화산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 등 희귀한 해조류들이 살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독도는 한국인에게 있어 역사이기도 합니다.

약 1500여년전 한국의 신라 왕조때부터 독도에 대한 기록이 소개되어 있고, 삼국사기, 세종실록지리지와 같은
한국의 여러 역사책과 문헌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독도는 한국인에게 있어 민족의 자존심입니다.

1905년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격침하여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5년 후인1910년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여 무려 35년간 한국인의 삶에 막대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끼쳤습니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망으로 1945년 조선은 해방이 되었고,
독도등 조선의 모든 영토는 대한민국에 반환하게 되었으나,
일본은 제국주의 시절의 군국주의적 열망을 버리지 못해,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독도는 한국인에게 있어 평화를 향한 십자가입니다.

한국인에게 있어 독도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 통치에 맞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민족의 자존심이며, 21세기 다시는 아시아에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못하게 만드는 십자가입니다.

<독도관련이해 참고사이트>

http://www.dokdo.go.kr/
http://www.dokdo.re.kr/
http://www.dokdomuseum.go.kr/
http://www.korea.net/news/issues/issueView.asp?issue_no=45

Dokdo, Korean desire towards the peace over the Asia -VANK

Dokdo, Korean desire towards the peace over the Asia -VANK

새역모와 뉴라이트의 역사왜곡

[기자닷컴] 새역모와 뉴라이트의 역사왜곡
2009년 04월 15일 (수) 10:20:53 정영대 기자 sunlight87@siminsori.com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했다.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 모임(이하 새역모)과 한국의 뉴라이트 교과서 포럼이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난 9일 새역모가 지유샤(自由社)를 통해 검정 신청한 역사왜곡 교과서를 통과시켰다. 지난 2001년 후소샤(扶桑社)에서 왜곡된 교과서를 발간한 데 이어 두 번째다.

내용은 후소샤판를 그대로 베낀 복사본과 진배없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면서 창씨개명과 징용의 강제성에는 시치미를 뚝 뗐다. 임나일본부설을 부추기고 천황을 신화의 경지까지 격상시키는 유머 수준의 창작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본정부가 앞장 서 교과서 검정을 통과시킨 것은 역사왜곡의 배후임을 노골적으로 자인한 것이다. 특히 2005년 우리정부가 시정을 요구했던 내용은 단 한 줄도 수정되지 않은 채 단박에 묵살됐다. 우리 정부는 부랴부랴 유감성명을 발표하고 주일대사관을 통해 항의하는 등 진종일 부산을 떨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한편의 쇼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우리 정부가 일본이 작심하고 교과서를 왜곡할 수 있도록 빌미를 준 탓이다. 지난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우리역사 학계는 해묵은 ‘좌파-이념’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그 분란의 중심에는 조·중·동과 한나라당, 뉴라이트를 축으로 하는 삼각동맹이 있었다. 뉴라이트가 문제를 제기하면 조·중·동이 띄우고 한나라당이 지원하는 식이었다.

지난해 3월 뉴라이트 교과서 포럼은 ‘한국 근·현대사’를 출간했다. 출판물은 유관순과 김좌진, 안중근을 ‘체제부정 불순분자’ 혹은 ‘악질 테러분자’로 소개했다. 종군위안부는 ‘자발적인 성 매매업자’로, 김구는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한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헌이 전혀 없는 빈라덴 같은 인물’로 묘사됐다.

교육과학기술부도 고교 2·3학년용 역사교과서 50여개 항목에 ‘좌편향’ 딱지를 붙이며 수정을 요구했다. 새역모와 뉴라이트가 근·현대사에서 인식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역사왜곡은 범죄를 재구성하는 행위”라고 했다. 역사교과서 왜곡은 알리바이 조작을 통해 범죄를 은폐하거나 왜곡하려는 시도다.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단체가 교과서 왜곡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다. 이들의 마주치는 손뼉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군홧발소리가 자동 연상된다면 너무 과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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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자동차 광주판매 안 돼!

[기고]미쓰비시자동차 광주판매 안 돼!

기사 게재일 : 2009-10-04

1944년 불과 13~15살 되는 어린 나이에 미쓰비시중공업(주)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몸 버린 여자’ 취급을 받아 인생이 산산이 깨져버린 사람들. 이제는 80대 할머니가 되어버린 분들을 근로정신대 할머니라 한다.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옛 기록이 아니다. 65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히 계속되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다. 할머니들은 생존해 있다. 그동안 한 많은 인생을 살다 서럽게 죽어간 분들이 훨씬 많기는 하지만.

미쓰비시중공업(주)을 아는가? 미쓰비시는 일제침략 당시 탄광, 조선소, 항공기 제작소 등을 운영한 군수업체다. 태평양전쟁에 가담한 전범기업으로 아시아 민중들을 착취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업체다.

이 기업에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10만여 명에 이른다. 현재도 일본 최대의 군수업체다. “일본에 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게 해 주겠다”고 속여 강제노동을 시키고 어린 소녀들의 임금마저 떼먹은 반인륜적 기업이 바로 미쓰비시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협력으로 지난 10년 동안 일본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재판을 해 왔다. 결론은 모두 기각 판결로 끝났다. 기각 판결의 근거는 한일협정이다.

지금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굴욕적인 한일협정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비극으로 내 몰았기 때문이다.

둘째,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들이 대한민국 지배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미쓰비시는 사죄하지도, 보상하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광주(민주, 인권, 평화의 도시)에 그것도 광주시청(도시의 얼굴) 앞에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아리랑 3호’ 발사 용역업체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여섯째, 한일관계는 인류 보편타당한 가치인 생명과 평화 정의와 다양성의 관계로 새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수행을 위해 불과 13~15살 되는 어린 소녀들을 강제연행, 강제노동, 임금체불 등등 온갖 협박과 차별, 착취를 저지른 미쓰비시를 이 광주에 한시라도 머물게 할 수 없다.

지난 과거 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미쓰비시는 지금도 일제침략을 미화하고, 독도를 일본 땅이라 주장하는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막대한 후원금을 내고 있고 2011년 ‘아리랑 3호’발사 용역업체로 선정되어 있다. 성큼 이 땅에 와 있다. 평화를 이뤄가야 할 땅에 전쟁의 더러운 돈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

1인 시위도 좋다. 사진전도 좋다. 서명운동도 좋다. 집회도 좋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설움을 씻고 승리의 환호를 나누어야 한다.

일본의 자민당 정권이 무너졌다. 불의한 정권은 망한다는 역사적 증거를 보고 있다. 세계의 역사는 생명, 평화, 해방, 다양성의 날개를 펄럭이며 비상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는 미쓰비시는 세계와 함께 가지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이라 하더라도 전범기업이라는 더러운 명예는 그림자처럼 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내게 일왕을 죽일 기회가 있다면 50여 년 간의 고통과 시련의 한을 풀기 위해 나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고 말한 어느 일제피해자 유족의 각오를 미쓰비시는 새겨야 할 것이다. 김희용 <시민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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